제목 :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국익중심의 실용외교
■ 국제질서의 대변혁기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국제정세는 전례 없이 요동치고 있다. 안보와 경제·통상 환경, 그리고 국제질서 모두 그렇다.
안보 면에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질서의 근간인 주권과 영토 보전 원칙을 뿌리째 흔들며 ‘역사의 귀환(the return of history)’을 실감케 했다. 그 앞에서 유엔도 무기력한 상태로 들어갔다. 2023년 말부터 중동지역에서는 또다시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동아시아에서는 대만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긴장이 일상화되며 언제 어떻게 군사적 충돌 사태가 촉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작년에는 한반도가 무력분쟁의 도화선이 될 뻔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경제통상 면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를 기반으로 했던 탈냉전기의 신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중 경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분절화되고, 첨단기술 수출통제가 강화되며 경제적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 보호주의와 자국 우선주의의 거친 힘 앞에서 WTO에 기반한 국제사회의 무역체제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나라들이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산업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자유무역 국가인 우리에게 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질서는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바뀌고 있다. 인도와 브라질 같은 ‘신흥국’들이 부상(‘Rise of the Rest’)하며 커진 국력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이에 비해 서방진영은 대규모 이민 문제가 가져온 국내 분열과 극단화 속에서 미래에 대한 근원적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열린 사회’에 대해 서방이 오랫동안 가졌던 확신이 흔들리면서 국제질서에서 규범과 가치의 위상도 퇴조하고 있다.
세계는 이제 脫-탈냉전기로 접어들었다. 격랑의 전환기가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금 단계에서 누구도 확실하게 얘기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느 나라든 북극성만 바라보고 항행하기에는 복합위기의 파고가 너무 험난하다는 점이다. 우리로서는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국익을 핵심 좌표로 하는 실용외교를 항해술로 삼아,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해나가면서 작금의 위기를 헤쳐나가야(navigate) 할 것이다.
■ 한반도와 동북아 긴장 완화 추구
첫째, 안보 측면에서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한반도가 새로운 분쟁의 단층선(fault-line)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전쟁 예방외교이다.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발전시키고 우리의 자체 국방력을 강화해야 함은 물론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지속적으로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확장억제를 포함한 미국의 흔들림없는 對韓 방위공약, 그리고 호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동맹 현대화를 추진한다는 우리의 의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북핵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적대관계를 평화공존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깰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말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피스메이커(peacemaker)로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면 페이스메이커(pacemaker)로서 지원하겠다고 한 것은 북미대화와 남북대화의 순서에 연연하지 않고 대화 재개와 평화 정착을 조속히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핵 없는 한반도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다. 이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다른 나라들도 핵무장의 유혹에 빠져들고 반세기 넘게 지탱되어온 비확산 체제는 위협받을 것이다.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정부는 중단–축소–폐기로 이어지는 단계적 비핵화 전략을 구체화하고 실행 방안을 추진하여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 함께 진전되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다. 이를 위해 고위급에서 합의된 한미 공조를 토대로 북핵 대화 여건을 조성하고, 북미·남북 대화 재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에서 진영간 대립 구도가 심화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한·미·일 협력을 꾸준히 강화하는 한편, 한·중·일 3국간 협력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현재 공식 협상 재개를 논의중인 한·중·일 FTA를 적극 추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협정 체결이라는 목표 실현이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세계 3대 경제권인 동북아 3국이 역내 무역 장벽을 낮추며 공급망 등 교역 안정성을 제고하는 것은 진영간 대립구도의 형성을 완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와 체제가 다른 중국이 나날이 강력해지는 것을 보면서 일각에서 경계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국이 군사대국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 산업 경쟁력과 첨단기술 고도화로 오늘의 중국은 한국·미국·일본·독일의 제조업 능력을 합한 것보다 더 거대한 제조업 초강대국(manufacturing superpower)이자 과학기술 강국(science-and-technology powerhouse)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과거 한중간 수직적·보완적 분업 구조가 수평적·경쟁적으로 변화했으며, 우리는 이런 변화된 현실에 맞춰 중국과의 경제협력 모델을 가꿔나가면서 우리의 미래 먹거리를 지켜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여전히 우리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수출대상국 1위이자 14억 인구를 가진 시장이며, 한반도 평화 정착과 동북아 지역 안정에 건설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이다. 따라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이자 ‘중요한 이웃’으로서 중국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혐중 정서가 확산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내 반한감정을 심화시켜 이웃간 불신의 악순환만 키우게 된다. 중국과 긴장 또는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우리의 주권이나 체제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 것은 확실히 지켜야 한다. 특히 중국의 서해 구조물 설치 등에 대해서도 원칙에 기반하여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강해지는 중국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연마해야 할 때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러시아와도 필요한 소통을 해 나가면서, 러·북간 군사협력을 중단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경제외교
둘째, 우리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는 외교를 통해 경제·통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우리 국익을 최우선시하며 양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패키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협상 결과가 우리 경제의 미래와 산업의 발전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조선, 원자력, 첨단기술 등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도 동맹국이자 제조업 강국인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는 동맹강화에 추동력을 부여하고 결국 경제안보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울러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중국 경제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미동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한 안보 동맹, 한미 FTA를 통한 경제 동맹을 넘어, 과학‧기술 협력을 세 번째 기둥(pillar)으로 삼은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과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한·일 정상간 상호 교차 방문을 조기에 성사시킴으로써 미래세대 교류와 수소·AI 등 미래산업 분야 협력 기반은 물론, 양국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인구감소와 지방활성화 문제 등에 대한 협력 모멘텀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 파트너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요 교역상대국 중 유일하게 우리와 양자 FTA가 체결되지 않은 나라가 일본이다. 과거에는 양국 경제가 경쟁적 관계로 인식되었으나, 실제 양국은 강점 분야가 달라 경제적으로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고려하여 공급망, 첨단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포괄적 협력을 아우르는 경제협력협정 체결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경제적,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우리나라의 가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12개 회원국이 참여중인 CPTPP는 시장 개방도가 높고 다양한 무역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 협정으로, 영국이 가입한 데 이어 최근 아세안·EU 등과도 협력 강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CPTPP 참여는 미·중 사이에서 우리 기업의 숨통을 틔우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이 기존의 WTO 중심 국제무역질서를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을 포함한 파트너국들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이달 말, 2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경주 APEC 정상회의도 디지털·AI, 기후변화, 공급망 등 현안을 주도적으로 논의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나가는 계기로 활용할 것이다.
■ 협력의 다변화 추진
셋째, 다극화되고 있는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의 협력 대상을 다변화하고 전략적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며 비슷한 전략적 고민을 하고 있는 우방국들과 연대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와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 참가 등 계기에 호주, 캐나다, 영국, 폴란드, 체코 등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필자 또한 유엔에서 독일, 캐나다, 호주 외교장관 등과 회담을 갖고 MIKTA 외교장관회의를 주재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지난 9월 유엔 총회 계기에 인태지역의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와 유럽의 독일, 영국, 프랑스, 폴란드와 8개국 외교장관 회담이 처음으로 열렸는데,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가운데 유럽도 우리와의 협력 증진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유럽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경제통합을 통해 평화를 이룬 지혜와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북아에서 평화·협력의 질서를 지향하는 우리에게는 특별히 소중한 협력 대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인도, 브라질, 멕시코, 남아공 등 주요 신흥국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필자도 한국 외교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취임 초에 인도를 조기에 방문하여 외교장관회의를 가졌는데, 모두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흐름 속에서 우리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있게 될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G20 정상회의 등 주요 외교무대도 다양한 사안을 심도있게 논의하며 협력 다변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 초당적 외교를 향해
이재명 정부는 이념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중심으로 실용외교를 펼쳐 나갈 것이다.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초당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해 나갈 것이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초당적 외교만이 중장기적으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1800년 정조 사후 실학파는 몰락하였다. 이념과 사상 논쟁에 매몰된 세도정치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우리는 100여년 후 나라를 잃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나라에게 결정적 전환기(critical juncture)일 수도 있다. 외교부는 이념과 사상에 얽매이지 않는 실사구시의 외교를 통해 우리 국익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끝.